1 |
121-123 |
쇠고기, 광우병 |
2008년 6월 11일 |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
한-미 쇠고기 관련 추가협상 관련 발언 |
6월 1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다. 추가 협상을 국민에게 어떻게 이해시키느냐의 문제였다. 이동관 대변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추가 협상이 재협상이냐 아니냐는 구도로는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재협상이 왜 불가한가’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재협상이 국익에 어떤 피해를 끼치며, 왜 추가 협상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종찬 민정수석이 다른 의견을 냈다.
“지금 우리가 추가 협상을 통해 사실상 재협상을 하고 있는 셈인데, 재협상이 아닌 듯하고 있어 시위대가 계속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걸 잘 이해시킬 수있는 방법이 있는지 고민해야 할것 같습니다.”
박재완 정무수석이 다시 반론을 폈다.
“‘추가 협상이 사실상 재협상이다’는 말로 설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시위대 주장대로 재협상을 하면, 앞으로 5년 동안 정부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정부가 무능해서 협상을 잘못했거나, 겁박에 굴복했다는 것 두 가지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정부가 하는 일마다 길거리에서 반대 투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김중수 경제수석이 보충 설명을 했다.
“지금 광우병 집회를 주관하는 단체들이 요구하는 재협상은 우리 생각과는 다릅니다. 국제기준이나 OIE의 권고 같은 것은 모두 무시 하고, 자기들의 기준으로 재협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협상을 잘해서 그 결과를 재협상이라 이야기해도 ‘정부가 사기를 치는 것’이라 몰아갈 것이 뻔합니다.”
이번에는 이종찬 민정수석이 반론을 폈다.
“광우병 단체들의 논리는 우리가 전문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대응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국민이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재협상 아닙니까? 그런데 그 효과를 못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빨리 재협상이라는 용어를 썼다면 국민들과 광우병 단체들이 분리됐을 것입니다. 광우병 단체들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이것은 사실상 재협상과 같다’고 설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서 곽승준 국정기획수석이 말했다.
“지금 집회에 나오는 어린 학생들은 재협상, 추가 협상이 뭔지 잘 몰라요. 그 친구들은 ‘아, 우리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따름이에요.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을 좀 더 빨리 해 줌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킬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종찬 수석님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합니다.”
모두 다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나는 다른 행사 참석을 위해 먼저 일어나면서 참모들에게 이야기했다.
“어제 사고가 안 일어나서 다행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안전사고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 생명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들 고생이 많은데 이번 일로 우리는 참으로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느끼게 됩니다. 모든 공직자들이 더 많이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논의는 종합적인 관점에서 좀 더 진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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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32-141 |
금융위기 |
2008년 10월 1일 |
거시경제정책협의회 회의 |
경제상황 등에 대한 발언 |
강 장관이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를 설명했다.
“가장 큰 메인스트림인 미국이 막히니 세계경제 흐름이 모두 막혀버렸습니다. 우리 외환 담당 은행원들은 지금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자금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사상 초유의 위기입니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4위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 신청을 발표했다.
……………….
나는 강 장관에게 물었다.
“외환 수급에 문제가 있다면 큰일인데. 지금 외환보유고 상황은 어떻습니까?”
“좋진 않습니다. 지금 우리 외환보유고는 2,400억 달러 정도 되지만, 최악의 경우 단기 부채가 차환(借換, 연장)되지 않고 모두 빠진다 해도 200억 달러 정도가 남습니다. 문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언론까지 가세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기 부채를 제외하면 외환보유고가 1억 달러밖에 남지 않는다고 과장되어 보도 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경제심리가 더욱 악화되고 투기 수요가 생겨나면 감당하기 힘듭니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다. 특히 위기 국면에서는 경제심리가 악화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나는 참석자들에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꾸 그런 식으로 심리적 불안을 키우면 일어나지 않을 위기도 일어날 수 있어요.”
…………………...
그 일을 떠올리며 나는 강 장관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사실 강 장관을 탓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참석자 모두에게 할 말을 강 장관에게 한 셈이었다.
“안일하게 대응하다 사태가 더 악화된 것 아닙니까? 외평채 문제만 해도 그렇지. 지금 나라가 외환위기를 맞게 생겼는데 금리가 문제예요? 기업도 국가도 어려울 때는 유동성 부족으로 망하는 거예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 장관이 대답했다. 강 장관은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곧잘 흥분해 얼굴에 나타났다. 그만큼 열정도 있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금융위기가 터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때 우리 외평채의 가산금리가 2.5퍼센트포인트 까지 올랐습니다. 그렇게 높은 금리로 한국이 국채를 발행하면 오히려 국제사회에 ‘한국 경제가 어렵다’는 나쁜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발행하면 은행들도 더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야 하고.... 그래서 외평채 발행을 포기한 것입니다.”
박병원 경제수석이 강 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실무자들은 너무 비싼 가격으로 발행했다가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어떻게든 상황이 좀 더 좋을 때 차입할 생각으로 미루다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이미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앞으로 위기 국면에서 공직자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높은 금리로 외평채를 발행했다는 책임 추궁을 당하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위기상황인데 금리가 좀 높다고 그러면 되겠어요? 공직자들은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은행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비상시기에는 정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진 해외 금융자산을 모두 팔아서라도 외화유동성을 확보해야 하는 거잖아요. 기업이나 국가나 흑자가 나도 유동성이 부족하면 흑자 도산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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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47-148 |
금융위기 |
2008년 10월 11일 |
경제 상황 점검 회의 |
한-중-일 통화스와프 관련 발언 |
나는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한·중·일 재무장관회의를 추진해 도움을 주고받을 방법이 없을까요?”
불확실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중국은 2조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상태였다. 한·중·일 협력이 가능하다면 외환위기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강만수 장관이 대답했다.
“2주 뒤 있을 IMF총회때 제가 일본과 중국 측을 만나 제안해보겠습니다.”
은행들이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는 급박한 상황에서 미국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일이라도 한·중·일 재무장관회의를 열자고 우리가 먼저 제안하세요.”
다음 날 언론을 통해 우리가 세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한·중· 일 재무장관회의를 제안한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사흘 뒤인 10월 6일 청와대에서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정례회동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한·중·일 재무장관회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한· 중·일 3국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게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달 말 중국 베이징에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한·중·일 3국이 참가하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열리는데, 그 자리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겠습니다. 동아시아는 현재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있습니다. 3국이 힘을 합치면 금융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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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97 |
외교 |
2008년 4월 18일 |
한미 정상회담 |
부시 대통령과의 미국 비자면제 프로그램(VWP) 가입 수락 관련 대화 |
라이스는 “아직 비자 면제 요건이 갖춰지지 않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답했다. 사전에 우리 외교부가 미 국무부와 실무 협의 후 내게 보고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그래서 제가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 경제도 발전하고 국가 위상도 높아져 양국 국민 간 활발한 왕래가 미국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개선 돼야 합니다. 임기 중에 처리해주신다면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정서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부시는 “내 임기 중 처리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나는 “올해 안에 되도록 해달라”고 재차 주문했다. |
5 |
208-209 |
외교 |
2008년 11월 7일 |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과의 전화 통화 |
당선 축하 인사, 금융위기, 북한, 한미동맹 등에 대한 대화 |
나는 오바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이 오바마 당선인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흑인 미국 대통령의 당선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같은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자 오바마가 답변했다.
“나는 하와이에서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과 접하며 자랐습니다. 불고기와 김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태평양 연안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싶습니다. 이 대통령과도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습니다.”
의례적인 인사 통화일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오바마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우리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오바마의 답변에 나는 화답했다.
“고맙습니다. 나도 오바마 당선인의 선거 과정을 눈여겨봤습니다. 하와이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손자의 대통령 당선을 목전에 두고 타계하신 외할머니 소식은 저도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이번에는 오바마가 화답했다.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나는 이 대통령께서 젊은 나이에 현대에서 이룬 업적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해도 못다 할 일을 대통령께서는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다하셨습니다.”
뜻밖에도 오바마는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대통령께 세계 금융위기를 포함해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미 양국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오바마에게 평소 생각하고 있던 한·미 동맹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말씀을 들으니 아주 든든합니다. 당선인 말씀처럼 세계는 금융 위기와 에너지, 자원, 환경, 빈곤 문제등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미 양국이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특히 21세기 한·미 동맹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일에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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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18-232 |
외교 |
2009년 11월 19일 |
한·미 정상회담 |
오바마 대통령과의 한미 FTA 관련 대화 |
청와대 접견실에서 오바마와 마주 앉았다.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은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동아시아 문제를 먼저 얘기한 후 FTA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말씀하시죠.”
오바마가 대답했다. 앞서 몇 개국 순방을 마치고 한국에 온 그는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동아시아 문제라 하면 중국 문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지금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교역량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과의 교역량은 상대적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나라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과 리더십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미국과 일본을 합친 금액보다 중국과의 교역액이 더 큰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국과의 교역량 확대를 위해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교역량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양국 관계가 긴밀해진다는 뜻이다.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중시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한·중-한·미 간의 교역량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를 좁혀나갈 방안이 바로 FTA 체결이다. 나는 한·미 FTA 는 경제문제를 넘어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강조 한 것이다.
오바마가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지만 나는 좀 더 부연 했다.
“한·미 FTA가 2년 6개월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번 미국 방문 때 미 상·하원 지도자들을 만나 한·미 FTA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한·미 FTA가 한·미 동맹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선거구에 관련된 이야기만 해서 매우 아쉬웠습니다.”
당시 미 민주당에서는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한·미 FTA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직접 만나본 결과 펠로시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민주당 출신인 오바마를 설득해 펠로시의 입장 변화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미 상·하원 지도자라고 에둘러댔지만 그것은 오바마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나는 오바마에게 한·미 FTA는 지지 세력의 이해와 정치적 득실에 따라 계산할 문제가 아님을 알리고 싶었다. 또한 한· 미 FTA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 말씀이 맞습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교역량 비중이 점점 줄어든다면 아시아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미국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시아에서의 교역량을 늘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오바마는 내 의견에 공감을 표한 뒤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불균형이 워낙 큰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과 FTA를 맺으면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미국 내에 제기 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산업은 미국으로서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의원이 있습니다.”
오바마는 계속 말했다.
“나는 한·미 FTA를 완결할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듯이 한·미 FTA가 경제적인 측면 이외에도 전략적인 의 미가 크다는 점을 미 의회에 계속 강조하겠습니다. 다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한·미 FTA 조항에 대한 실무자들끼리의 약간의 조정이나 변경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예로 들어 한국의 양보를 요구 했다. 나는 미국 내의 그러한 시각이 잘못됐음을 설명했다.
“미국은 중국에 연간 3,000억 달러, 일본하고도 700억 달러에서 800억 달러 정도의 무역역조가 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는 무역역조의 규모가 상품 통상만을 따지면 80억 달러, 미국의 한국에 대한 서비스산업 흑자까지 감안하면 7억 달러에서 8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는 매우 균형적이라 할 수 있는데, 중국, 일본 과의 무역역조가 크다 보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담백한 성격이었다. 이내 내 말에 수긍했다.
“이 대통령께서 중요한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앞으로 미국 의회와 미국인에게 한·미 FTA가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득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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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280-288 |
외교 |
2010년 11월 28일 |
다이빙궈 중국 국무위원과의 대화 |
북한 천안함 관련 대화 |
다음 날, 다이빙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최근 상황으로 볼 때 남북 양측은 서로에게 강경한 태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중국 국민들은 북한이 무력 대응을 할 경우 큰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현 정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정과 이성 그리고 자제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께서 이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보고 계신지 말씀해주시면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께 보고하겠습니다.”
이어 다이빙궈는 한·미연합훈련이 전쟁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다이빙궈에게 이야기했다.
“대통령이 되어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미 관계가 한·중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 관계이지만 미국이 동북아 국가를 공격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반대할 것입니다. 북한의 도발이 없었다면 조지워싱턴 호가 서해에 들어오는 것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조지워싱턴 호의 작전 반경은 1,000킬로미터에 달해, 서해로 들어올 경우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주요 영토가 사정권에 들었다.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중국의 반대에는 그 같은 우려가 내포돼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한·미 동맹은 그동안 방어적 역할에 머물며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그것을 악용하는 것 같습니다. 무력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자신들은 잃을 게 없다는 막다른 생각으로 도발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잃을 것이 많더라도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어서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KAL)기 폭파 등 그동안의 북한의 도발을 예로 든 후 다이빙궈에게 말했다.
“이번 훈련을 트집 잡아 북한이 어떤 일을 저지른다면 우리는 강력하게 응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제공격이 아닌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신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뜻을 북한에 분명히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북한은 훈련이 강행될 경우 또다시 우리 영토를 포격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나는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경우 연평도 때와 달리 강력한 군사적 응징을 가할 것을 우리 군에 지시한 상황이었다. 중국 측에도 이 같은 뜻을 전한 것이었다. 이어서 나는 중국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국은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은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중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거치면서 과연 중국이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됐습니다. 중국이 북한 에 대해 좀 더 공정하고 확고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께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달 뒤, 다이빙궈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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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290-298 |
외교 |
2012년 1월 9일 |
한·중 정상회담 |
후진타오 국가주석과의 한중 FTA, 중국어선 불법조업, 탈북자 관련 대화 |
이날 열린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한·중 FTA 이야기를 꺼냈다.
“중·한 FTA를 조속히 실현하는 것은 양국의 경제통상 협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양측이 결단을 내려 중·한 FTA 협상을 조속히 개시하기 바랍니다.”
한·중 FTA는 2010년 9월부터 양국 간 사전 실무 협의가 진행돼 왔다. 2011년 말에 한·미 FTA 법안이 우리 국회를 통과하면서 중국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FTA 협상을 공식적으로 개시한다는 것은 FTA 체결 방침을 기정사실화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후진타오에게 대답했다.
“한·중 FTA 협정은 양국 관계를 한 단계 높이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농산물을 비롯해 민감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전에 먼저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 다고 봅니다.”
……..…….
“저는 대통령님과 한국 정부가 중국 어선의 서해상 조업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우려를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 측은 한국 측의 어업 질서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민에 대한 교육과 관리를 계속 강화해나가겠습니다.”
2012년 1월 9일,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말했다.
……..…….
나는 후진타오에게 한반도 통일 문제를 이야기했다.
“통일이 되면 한·중 양국은 1,200킬로미터(1,300킬로미터인데 당시 잘못 알고 발언했다)의 국경을 마주하는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한·중 관계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내 발언은 한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그 동안 중국에서는 금기시되는 내용이었다. 과거 한·중 정상 간의 대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한반도 통일 후 미군은 현재 주둔하고 있는 위치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통일 후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 문제도 이야기했다.
……………..
2012년 1월 10일,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이 있었다. 회담을 마치고 우리는 조어대 만찬장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오갔다.
“저는 북한의 젊은 지도자(김정은)에 대해 잘 모릅니다. 북한 내부 사정이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아무리 과격한 말을 해도 접촉과 대화를 견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양을 서두르면서 대남 비방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자는 원자바오의 말은 이를 두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원자바오가 김정은을 ‘젊은 지도자’로 표현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때가 되면 정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뀝니다. 원자바오 총리와 저는 비슷한 또래입니다. 내년이면 우리 둘 다 은퇴합니다. 우리는 늙고 은퇴하는데 북한은 젊은 사람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앞으로 50~60년은 더 집권할 텐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죽을 때까지 집권할 텐데 우리에게 참고 인 내할 시간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
원자바오가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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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327-330 |
남북관계 |
2009년 8월 23일 |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와의 대화 |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 접견시 남북 정상회담, 북핵, 경제협력 등 관련 대화 |
“저희 장군님께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잘 실천되면, 앞으로 북남 수뇌들이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김기남 비서는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북한이 먼저 남북 정상회담 의사를 내비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임 정부시절 두차례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모두 남한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국제사회와 공조하여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단호한 제재를 가했다. 한편으로 북한에 지속적으로 대화를 제의하며 올바른 행동에 대해서는 지원을 하겠다는 입장을 표방해왔다. 대남 압박책 이 먹혀들지 않고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자 결국 북한이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일방적 경제 지원을 골자로 한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을 전제조건으로 내거는 모습에서 한계가 있었다.
“대한민국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이전 정권이 해 놓은 일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남북 간에는 많은 합의가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노태우 대통령과 합의한 문서도 있고, 저는 이 모든 것이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북한 조문단에게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환기시켰다. 1991년에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합의를 무시한 채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북한이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만을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지적이었다. 이어서 나는 이야기했다.
“남북 정상이 만나면 그런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에게 꼭 전해주실 말씀이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이 ‘북핵 문제는 북·미 간의 문제이니 남한은 빠져라, 남한은 경제협력이나 하면된다’고 주장해 왔는데 나는 그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볼 때, 북핵 문제는 북한이 금기시하는 의제로 기본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북한 조문단에게 남북 정상회담이 과거처럼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언급하지도 못하면서, 대북 지원 논의만 하는 것이라면 회담을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나는 북·미 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적극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북·미 간의 문제는 북한과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미 관계가 과거와 달리 대등하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되 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이 대화를 하면 북·미 관계에도 많은 도움 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어 북한 조문단에게 한국이 G20 의장국이 되었으며,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G20 차원에서 200억 달러를 모금하기로 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북한 역시 태도만 바꾸면 한국의 주도하에 국제사회와 공조하여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김기남 비서가 대답했다.
“미국이 근래에 와서만 핵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고, 해방 이후 60년 동안 조선 적대시정책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미국이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으면 무엇 하러 핵 억제력을 가지겠습니까? 조선 반도의 비핵화는 위대한 수 령님의 유지(遺志)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침략 위협에 직면해 자기방위를 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본은 북한과 남한이 우리 민족끼리, 우리는 핏줄기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북한이 반복해서 주장해왔던 틀에 박힌 답변이었다. 북핵 문제는 미국의 위협 때문이니 미국과 협의해야 하고, 남북한은 과거처럼 경제 협력이나 이산가족 상봉 같은 협의를 계속하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김 비서의 말을 끊고 이야기했다.
“지금 세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미 간의 관계에도 최근 현격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북이 힘을 합치면 북한이 원하는 평화와 안전, 체제의 유지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선 국제사회가 북한에 도움을 주기 어렵습니다. 나는 길이 있다고 봅니다. 그 길을 남북이 찾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남한, 이 문제는 미국, 이렇게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돌아가면 김정일 위원장에게 우리의 뜻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북한 조문단에게 남북 대화가 핵 문제 등의 논의를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 알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정확하게 모두 전달하여 올리겠습니다.”
김비서가 대답했다. 나는 접견을 마치고 나가는 김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 좀 잘 하세요.”
다음 날 언론에 북한 조문단 접견 자리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논의를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는 “정상회담은 아직 때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와 같은 그런 정상회담은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관행을 다 바꿔가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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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331-332 |
남북관계 |
2009년 10월 10일 |
베이징 한중일 정상회의 |
원자바오 총리와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화 |
이날 오찬 자리에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내게 물었다.
“대통령 각하, 내가 듣기론 남북한 실무자들 사이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가 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자바오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우리 측에 전한 메시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원자바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 문제 말입니까? 우리 실무자들이 접촉했는데 무슨 조건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는 못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원자바오가 말했다.
“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는데 정상회담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자바오에 의하면 김정일이 자신과 만난 자리에서 정상회담을 언급하면서, 나와의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김정일이 직접 원자바오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해온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안 자체를 신뢰할 수 있고, 중국의 중재 역할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자바오에게 말했다.
“지난번 조문단이 왔을 때도 분명히 말했는데,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된 것 같습니다. 북한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남측이 자신들을 만나려 안달한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나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원자바오에게 국내의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한 정상회담은 하지는 않겠다는 점을 김정일에게 분명하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서 나는 이야기했다.
“다만 정상회담의 대가나 조건 없이 만나 핵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지난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했으니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했으면 합니다.”
원자바오는 내 뜻을 김정일에게 정확히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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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334-335 |
남북관계 |
2009년 10월 24일 |
타이 후아힌 아세안+3 정상회의 |
원자바오 총리와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화 |
원자바오는 다시 한 번 김정일의 뜻을 내게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 각하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습니다. 나는 조건 없는 남북 정상회담을 바랐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볼때 그 조건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각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니 김 위원장과 연락할 기회가 되면 각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원자바오는 자신이 한 말조차 김정일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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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335 |
남북관계 |
2009년 11월 7일 |
임태희 장관과의 대화 |
북측이 제시한 남북 정상회담 합의서 관련 대화 |
북측이 8월에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시점부터 줄곧 요구해온 조건과 동일했다. 문서에 지원 내역과 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 마치 무슨 정형화한 ‘정상회담 계산서’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임 장관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합의서를 써준 적은 없습니다. 회담이 중단된 후 통-통(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 날짜를 잡자고 하니 김양건이 그동안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는지를 확인만 해달라고 해서 확인해준 것은 있습니다.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 북한 측이 정리한 두 장짜리 회담 내용을 가지고 오기에 제가 잘못된 몇몇 부분은 두 줄로 지우고, 옆에다 새로 덧붙이기도 하고, ‘이건 맞다. 이건 아니다’는 식으로 수정해서 제 사인을 했습니다. 이러이러한 내용을 논의했다는 것이지, 합의문은 분명히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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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350 |
남북관계 |
2010년 11월 23일 |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 |
연평도 피격 관련 발언 |
뒤늦게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도착했다. 나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회에서 시간을 지체한 데 대해 김 장관을 크게 나무랐다. 그러고는 김 장관에게 물었다.
“북한이 200발을 쐈다는데 우리는 왜 80발만 쐈어요? 두 배로 쏴도 부족할 판에......”
“200발은 추정 수치이고, 실제로 육지에 떨어진 것은 70에서 80발 정도로 판단됩니다. 그래서 교전수칙에 따라 80발을 쏜 것입니다.”
김 장관이 대답했다.
…………….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관련하여 브리핑을 들은 후 나는 한민구 합참의장에게 지시했다.
“이번 도발은 대한민국 영토를 포격한 것입니다. 특히 민간인에게 무차별 공격을 했다는 점에서 중대 상황입니다. 아직 북한이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해올 경우 우리 군은 육·해·공군 모두를 동원해 몇 배의 화력으로 응징하세요.”
나는 다시 한 번 확고한 대응을 강조했다.
“평상시 우리는 전수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민간인에 게 무차별 포격을 하는 상대에게는, 분명히 다시 이야기하지만 우리 영토와 국민에 대한 공격에는 교전수칙을 뛰어넘는 응징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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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359 |
남북관계 |
2011년 5월 22일 |
도쿄 한중일 정상회의 |
원자바오 총리와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화 |
긴급 회담이 이루어졌고 원자바오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께서는 2009년 10월 내게 북한을 조속히 방문하시겠다고 하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러 이유로 방문이 성사 되지 못했습니다. 오랜 친구로서 저는 대통령께서 결심을 내려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2009년에도 김정일은 원자바오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나는 당시의 상황부터 이야기했다.
“2009년 나는 총리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핵 문제를 비롯해 국군포로, 이산가족, 납북자 송환, 상호 협력 등 다양한 의제를 제한 없이 다루고자 했습니다. 북한을 지원하는 문제는 남북 정상회담과는 별개의 문제로, 정상회담을 하는 대가로 북한을 지원할 수 없다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어 나는 2009년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 했다.
“그러나 북한은 과거의 전례대로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를 요구해 왔습니다. 북한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남쪽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남북 관계도 정상화될 수 없습니다. 만나더라도 의미 없는 만남입니다. 나는 남북 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나는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은 ‘만난다’는 것보다 ‘만나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한반도를 대표하는 북한이 남쪽 대표를 만나준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만나주는’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듣고 원자바오가 답변했다.
“저도 2009년의 일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오자 매우 흥분해서 한국의 지난 두분 대통령과의 회담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아무런 조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대통령께서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정일 위원장 밑의 사람들의 권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께서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남북 접촉과 관련하여 원자바오에게 이야기했다.
“지금 남북 실무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가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북한이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에 대해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야 남북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북측에 알렸습니다. 그러 나 북한 측 실무자들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되고’하 는 식으로 성의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잘못 된 것은 잘못됐다고 북한이 인정해야 저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원자바오가 답변했다.
“이 대통령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저는 중간에서 그것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제가 이 대통령의 의견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정확히 전달하겠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저의 이러한 진지한 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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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364-365 |
남북관계 |
2010년 2월 8일 |
한·독 정상회담 |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과 통일비용 관련 대화 |
2010년 2월 8일 청와대에서 가진 한·독 정상회담에서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은 독일 통일로 인해 발생한 통일 비용에 대해 언급했다.
“통일이 되자 동독 지역에도 서독 수준의 연금, 의료보험, 실업수당이 지급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통일비용 부담이 너무 커졌습니다. 지금 과거 동독 지역 사람들의 1인당 소득은 체코나 폴란드의 경우 보다 훨씬 높은데도 서독 사람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의 경우를 교훈으로 삼아, 한국이 통일이 되면 남한의 사회보장제도를 처음부터 획일적으로 적용하기 이전에 우선 북한 지역의 경제와 사회보장 수준을 점차 끌어올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쾰러 대통령이 말을 이어갔다.
“독일 통일은 사실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 국민들이 이끌어냈습니다. 서독의 마르크가 동독으로 오지 않으면 자신들이 서독으로 가겠다고 외쳤기 때문에 동독정권이 화폐 통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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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390 |
한일관계 |
2010년 8월 10일 |
일본 간 총리와의 전화 통화 |
조선왕조의궤 반환 관련 대화 |
2010년 8월 10일 간 총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한 관계에 대한 담화가 내각회의에서 결정됐습니다. 대통령께 직접 내용을 전달하려 전화드렸습니다.”
간 총리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앞서 내게 그 내용을 설명했다.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금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 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된 귀중한 도서를 필요한 절차를 거친 뒤 가까운 시일 내에 인도하겠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
간 나오토 담화는 사과의 대상을 한국으로 특정하고, 문화재 반환 등 사과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라야마 담화보다 확실히 진일보한 것이었다.
“나는 한·일 양국이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면 안 된다고 한결같이 강조해왔습니다. 간 총리가 나와 뜻을 같이하니 기쁩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 양국 관계는 미래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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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398-401 |
한일관계 |
2011년 12월 17일 |
한일 정상회담 |
교토 영빈관에서 노다 요시히코 일본총리와 위안부 관련 대화 |
“최근 10년 동안 약 4만 명에 달하는 베트남 여성이 한국에 시집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7월 한국인 남편이 베트남 아내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노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나는 베트남 대사를 고인의 친정집에 보내 사과와 애도의 마음을 전하고, 국제결혼 중개업의 문제점도 시정해나가도록 지시했습니다. 베트남 여성들에게도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가정사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사과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딸을 보낸 베트남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 뒤인 작년 10월에는 직접 베트남을 방문했습니다. 찌엣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그 일을 다시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찌엣 주석은 관심과 협력에 감사하다고 인사했고, 만찬 자리에서는 저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형제의 연을 맺었습니다. 그로 인해 양국 간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나는 노다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대통령이 사과할 일도 아니고 법으로 따져도 책임이 없다’고 했으면 한국과 베트남 사이는 더 나빠졌을 것입니다. 한·일 양국 간에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소해 더 큰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노다에게 베트남 이야기를 한 것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전향적인 입장을 취해달라는 뜻이었다. 베트남 여성의 일은 가정사임에도 한국 대통령이 사과를 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한 일이었으므로 일본 정부가 사죄해야 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자 노다 총리가 답변했다.
“지금 베트남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난번 한국의 해양경찰관이 순직한 사건과 관련하여 중국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노다는 얼마 전 우리측 해역에서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이 우리 해양경찰관을 살해한 이야기를 했다. 참으로 엉뚱했다.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한 게 아니라 고의로 외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찬 다음 날 교토 영빈관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번에는 노다 총리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지금 살아계신 종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평균연령이 86세입 니다. 금년에도 열여섯 분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몇 년 후에는 남은 예순세 분의 할머니들이 한을 품고 모두 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피해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없어지겠지만, 그때 가면 이 문제를 해결 하려 해도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양국 관계에 큰 부담으로 남게 될 겁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총리께서 실무적인 발상을 버리고 보다 큰 정치적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노다가 답변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법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이 주제에 대해 앞으로 인도적인 견지에서 지혜를 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안건과 관련하여 지난 14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위안부 비(碑: 소녀상)가 건설됐습니다. 실무적 차원에서 우리 생각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대통령께 그 비의 철거를 요청하겠습니다.”
전날 만찬에서 베트남 신부의 예를 든 것도 일본이 법적·실무적 차원이 아닌 대국적 견지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노다 총리는 여전히 법적 문제를 거론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을 문제 삼았다. 노다 자신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누가 써준 것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한·일 관계는 끝없는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일본 대사관 앞 동상 철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일본 정부가 조금만 관심을 뒀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서울의 동상에 이어 할머니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제2, 제3의 동상이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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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422 |
외교 |
2008년 9월 29일 |
한·러 정상회담 |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가스나 석유를 북한을 경유하여 한국에 수출하는 사업에 대한 대화 |
나는 메드베데프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재 사할린-하바롭스크 간 가스관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스관을 설치하는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00킬로미터만 연결하면 한국에 가스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동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석유와 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북한을 거쳐 한국에 공급하자는 제안이었다. 20년 전 기업인으로서 꿈꿨던 일이었다. 러시아 방문에 내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소회가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성사만 된다면 한국으로서도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지금 철도가 하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북한을 경유하여 한국까지 연결이 가능합니다. 가스관은 철로를 따라 묻으면 됩니다. 이는 북한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러시아가 나서서 북한을 설득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메드베데프가 내 이야기에 공감을 표했다.
“가스나 석유를 북한을 경유하여 한국에 수출하는 것은 매우 관심 있는 사업입니다. 이미 러시아는 북한과 철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한국도 이 사업에 참여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철도 사업이 잘 추진되면 가스관 사업도 잘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려운 문제는 북한의 불확실성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북한 정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북한 정세에 대해 묻는 것은 다소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중국과 함께 러시아는 과거에 북한과 돈독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북한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메드베데프에게 이야기했다.
“북한은 알기 힘든 나라입니다. 최근 북한이 대외적으로 강경 노선을 취하는 것은 대외적 문제라기보다는 북한 내부를 단속하기 위한 조치 같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어려운 점이 있다면 주변국에 더 강경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 당사국들이 자주 만나 협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러시아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불확실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겠습니다.”
메드베데프의 답변에 나도 호응했다.
“앞으로 북한과 관련된 문제도 신속히 러시아와 협의할 수 있는, 그러한 한·러 관계로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동북 아시아 문제, 아시아 문제, 세계 평화와 공동 번영, 기후변화 문제 등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협력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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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430-431 |
외교 |
2009년 5월 11일 |
한·우즈베키스탄 정상회담 |
카리모프와 대통령과의 나보이 자유산업경제특구에 대한민국 이동통신 사업 제안 대화 |
공항에는 카리모프가 직접 영접을 나와 있었다. 방문 첫날에는 우리 동포들을 만났고 다음 날인 5월 11일 카리모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카리모프가 먼저 말했다.
“대통령께서 펼치고 계신 신아시아 외교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그 정책을 지지하고 협력할 의향이 있습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은 대한항공과 함께 나보이에 국제 물류 허브를 조성하는 사업을 준비 중이었다. 이와 함께 나보이 지역에 자유산업경제특구를 조성하고 있었다. 카리모프는 경제특구 사업에 한국이 협조해주기를 요청했다. 나는 카리모프에게 우즈베키스탄의 중점 사업에 대한 견해를 전했다.
“나보이 자유산업경제특구에서는 미래에도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산업을 유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성장 동력으로 이동통신 사업을 생각해보십시오. 지난해 12월에 페루의 가르시아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동통신 분야를 제안했더니 삼성과 LG 등 한국 기업들과 벌써 시작을 했습니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이동통신 사업을 확장하여 콜롬비아에까지 연결시키려 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이 먼저 시작하면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아우르는 이동통신 사업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자 카리모프가 말했다.
“대통령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삼성과 LG의 전자제품들 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삼성과 LG가 이동통신 분야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활약하는 데 전혀 제약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남부지역,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전체 지역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보이 경제특구는 한국 기업 위주로 구성이 될 것입니다.”
이어 카리모프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제안했던 사업도 언급 했다.
“대통령께서 언급하셨던 석유화학 분야에 대해서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우즈베키스탄에 가스화학 공장을 건립함으로써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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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436-437 |
외교 |
2009년 5월 12일 |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의 만찬 |
발하쉬 석탄화력발전소 수주에 대한 대화 |
폭탄주를 마신 뒤 나는 나자르바예프에게 말했다.
“대통령께서 발하쉬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이 삼성물산-한국전력 컨소시엄으로 낙찰되는 데 큰 도움을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지난해 베이징에서 이 대통령께서 이 문제로 면담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조치했습니다. 나중에 중국 측이 저를 몹시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발하쉬 석탄화력발전소는 수주 금액만 40억 달러가 넘는 대규모 사업으로, 삼성물산-한국전력 컨소시엄은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나는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 픽 개막식에 참석했을 때 나자르바예프를 만나 지원을 요청했었다.
이어 나는 나자르바예프에게 말했다.
“대규모 석유화학단지 조성 건이 있는데 우리 LG화학이 이 분야 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와이브로 사업센터를 구축하여 중앙아시아는 물론 인근 지역으로 이 기술을 전파하는 방안을 제가 삼성 측에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카자흐 석유화학단지 조성은 새로운 도시 건설로 연결되는 큰 사업입니다. 저는 한국 기업이 이 일을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와이브로에 대해서는 삼성 측과 구체적으로 협의를 해보겠습니다.”
나자르바예프는 이 제안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 사업들은 2011년 8월 25일 내가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했을 때 결실을 맺었다. 이날 삼성물산-한국전력 컨소시엄은 발하쉬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권을 확보하는 내용의 협정을 카자흐스탄과 체결했다. 또 LG화학은 아티라우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여 이를 카자흐스탄석유화학 (KPI)과 합자 형태로 운영하기로 하는 사업계약서를 체결했다. 두 사업의 규모는 총 80억 달러에 달했다.
이번에는 나자르바예프가 내게 제안했다.
“대통령의 747 계획을 입안한 30여 명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한국 최고 전문가 집단이라 알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학자와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해 747 계획 입안자들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우도록 하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최고 전문가들로 팀을 구성하여 파견하시면 747 계획 관계자들과 합동 팀을 만들어 좋은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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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443 |
외교 |
2010년 12월 9일 |
한·인도네시아 정상회담 |
유도요노 대통령과의 경제 개발 관련 대화 |
나는 유도요노에게 대답했다.
“국내 사정이 어렵지만 유도요노 대통령을 만나는 것 역시 보람 되고 중요한 일입니다. 대통령께서도 지난번 제주도 한·아세안 회의와 서울 G20 정상회의 때 어려움을 뒤로 하고 한국을 방문해주시지 않았습니까?”
2009년 5월 제주도 한·아세안 정상회의 당시, 인도네시아는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유도요노는 빠듯한 시간을 쪼개 제주도에 왔다. 2010년 머라삐 화산 폭발로 인도네시아 국내 정세가 혼란스러울 때도 유도요노는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 회의에 참석하는 성의를 보인 바 있다.
“저희는 앞으로 10년간의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경제개발에 한국이 주 파트너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장관들과 한국이 주파트너가 되고, 그다음에 일본,중국 등 다른 나라들이 파트너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포스코, 삼성, LG, 현대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투자를 강화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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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456 |
외교 |
2012년 5월 14일 |
한·미얀마 정상회담 |
떼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과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
인사가 끝난 후 떼인 세인은 말했다.
“이 대통령과 저는 유사한 점이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는 것, 그런데 대통령께서 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서 자라나셨습니다. 대통령의 가족이 전쟁을 겪은 점과 형 학비 때문에 진학 기회를 놓칠 뻔했다는 점도 저와 비슷합니다. 타이 고속도로를 건설하시며 강도들과 대결하신 것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대통령께서 말레이시아의 페낭대교를 건설하셨는데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습니다.”
떼인 세인은 이외에도 내가 살아 온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 과거에 대해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 출간된 영문 자서전 《The Uncharted Path》(《신화는 없다》의 영어 번역판)를 읽은 것이었다. 더불어 그는 자국어로 번역된 내 자서전을 미얀마의 모든 공무원들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선정할 예정이라 했다.
2009년 제주도에서 떼인 세인을 만났을 때 나는 그를 다소 경직되게 대했다. 이번 만남에서 그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떼인 세인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난 20년 간 미얀마는 국제사회의 많은 제재를 받으면서도 북한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대량살상무기를 구입하거나 군사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관련된 한국 정부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고 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떼인 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한 대화는 우리가 서로 신뢰하게 되고 우리 사이를 강하게 만드는 기반인 것 같습니다.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 기술이 미얀마로 흘러 들어와 협력을 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대통령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 믿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재래식 무기는 북한과 미얀마가 거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미얀마가 서방 국가들로부터 제재를 받아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북한과의 재래식 무기 거래도 유엔안보리 규정 위반입니다. 지난 과거는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부터라도 그런 점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나는 떼인 세인에게 당부했다.
“저는 전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베트남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 발전하듯이 북한도 새로운 시대를 열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얀마는 대통령님의 훌륭한 리더십으로 새 로운 친구들과 사귀며 새로운 미얀마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미얀마가 새로운 시대를 열 듯 북한도 변해야 합니다. 북한 은 미얀마를 배워야 하고, 베트남을 배워야 하며, 중국의 개방정책 을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께서 북한에 그런 권유를 하는 것이 북한을 도와주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의 진심 어린 제안에 대해 떼인 세인이 대답했다.
“솔직한 말씀과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과거에는 러시아와 함께 10메가와트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지금은 그 프로젝트를 중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국제사회로부터 의심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20년간 서방으로부터 많은 제재가 있었기 때문에 국방을 위해 북한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북한과 어떤 협력도 없습니다. 우리 는 유엔 안보리 결의 1718, 1874호를 엄격히 준수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세워졌기 때문에 앞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모든 국가들도 투명하게 대할 것입니다.”
“새로운 친구일 뿐만 아니라 좋은 친구, 서로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되기 위해 미얀마에 왔습니다. 미얀마가 필요로 하는 기술 분야에 대해 이제는 한국이 협력하겠습니다.”
나는 떼인 세인에게 이렇게 확답했다. 이후 미얀마 방문을 우려 했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정보가 잘못된 것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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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471-473 |
외교 |
2011년 11월 15일 |
국회 여야 지도부와의 만남 |
한미FTA 재협상관련 손학규 당시 대표와의 대화 |
손 대표가 말했다.
“대통령께서 국회를 방문하신 것이 야당에 대한 압박용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기다리시는데 저희가 나오지 않는다면 국민이 야당과 국회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대통령께서 저희가 안 나올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국민을 상대로 야당대표를 볼모로 잡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미 FTA 비준에 관한 민주당의 입장은 변함없고 분명합니다.”
손 대표는 ISD조항 폐기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오바마에게 서면으로 받아오지 않는다면 한·미 FTA를 비준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민주당의 기존 입장에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손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ISD 조항은 민주당 정권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민주당 정권 때 위원회까지 결성해 만들어 놓은 조항을 왜 이제 와서 문제 삼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것을 따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어 미국과의 ISD 조항 재협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우리가 미국 측에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반드시 응해야 합니다. ISD 조항이 문제라면 한·미 FTA 발효 후 재협상을 요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협정문에 따르면 한·미 FTA 발효 후 우리가 요구하면 재협상 절 차를 개시해야 한다. 재협상 절차가 개시되면 미국은 의무적으로 협상에 응해야 했다. 그러나 발효 이전에는 미국에 재협상을 요구할 근거가 없었다. 나는 그 점도 손 대표에게 설명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법률가입니다. 그런데 정해진 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재협상하자고 하면 우리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의 국격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우리가 무슨 미국의 종속국도 아닙니다. 미국이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어 나는 손 대표를 비롯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야당 인사들 모두에게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오라고 하시는데, 여러분은 오바마 대통령의 말만 믿습니까? 한국 대통령의 말을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미 FTA 발효 후 국회에서 원한다면 제가 책임을 지고 오바마와 협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손 대표의 입장은 완강했다.
“저희는 발효 전 한·미 FTA 폐기를 전제로 재협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미국이 재협상을 약속하는 문건은 있어야 된다는 것이 저희 민주당의 요구입니다. 발효 후 재협상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것만으로는 민주당이 비준에 응하기 어렵습니다.”
발효 후 재협상을 통해 ISD 조항을 한·미 FTA에서 삭제하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받아오라는 요구였다. 재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재협상 결과를 미리 약속한다는 것은 국제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러저러한 문제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얼마간의 자기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큰일을 결단하는 것이 정치인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죽는 것 같아도 결국은 사는 길입니다. 한·미 FTA가 발효되어도 제 임기 동안 얻을 수 있는 실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정권은 탄탄대로를 갈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것이 옳은 길이기 때문에 추진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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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486-487 |
외교 |
2008년 10월 21일 |
부시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 |
새로운 국제 공조체제에 대한 의견 수렴 및 제안 |
인사를 나누자마자 부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또 다른 위기를 예방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 공조체제의 구축이 필요합니다. 한국이 새로운 공조체제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지 이명박 대통령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미 G20 체제로 가기로 결정하고 묻는 듯했다. 부시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나는 부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국제 공조가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한국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세계 금융위기 극복에 협력하겠습니다.”
“미국 선거가 끝나고 11월 중순쯤 회의가 열릴 것 같습니다. 회의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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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493-494 |
외교 |
2009년 9월 6일 |
케빈 러드 호주 총리와의 전화 통화 |
G20 한국 개최 관련 대화 |
런던 G20 정상회의가 끝나고 6개월 뒤인 2009년 9월 6일 러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3차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를 보름 남짓 남겨둔 때였다.
“프랑스 측에서 G20을 G14로 대체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습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번 주에 브라질에 가서 룰라 대통령과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내년 6월 캐나다에서 G8 회의를 개최하는데 이를 G14로 바꾸고, 이어 2011년에 프랑스 G8 회의도 G14로 해서 G14 체제를 고착시키려는 전략입니다.”
이때까지도 G20은 세계경제 협력의 최상위 회의체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G14와 G20 체제를 두고 국제사회에서 힘겨루기가 한창이었다. 외교관 출신답게 러드는 국제 관계의 수 읽기가 빨랐다. 그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캐나다로 하여금 내년 6월에 하는 G8을 G20으로 확대하도록 설득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 말에 한국이 G20을 하게 된다면, 프랑스는 2011년 중반에 G14가 아닌 G20을 개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같은 스케줄을 이번 피츠버그 회의에서 명백하게 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G20이 정례화될 수 있습니다.”
G20을 살리는 것은 호주뿐 아니라 우리의 목표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우리 역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나는 대답했다.
“러드 총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 우리 사공일 특 보가 미국에 가 있습니다. 러드 총리와 논의한 내용을 미국 측과 협의 하겠습니다. 내년 6월 캐나다에서 G20을 열고, 11월 한국에서 G20을 여는 것을 이번 피츠버그 회의에서 동시에 결정할 수 있도록 의장국인 미국과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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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517-518 |
외교 |
2009년 11월 6일 |
UAE 모하메드와 왕세제와의 전화통화 |
원전 수출과 안보협력 제안 등에 대한 대화 |
“한국은 가장 경제적이고도 안전한 원전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전 국가적 차원에서 준비해 오고 있습니다.”
원전 문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모하메드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외교통상부 장관이 충분히 설명한 것을 되풀이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UAE의 경제와 교육, 안보 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의 장점을 부각했다.
“한국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왕세제께 양국 간의 협력에 대해 설명을 드릴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직접 방문 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계약은 프랑스와 하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 달라는 요구였다. 일단 모하메드의 경계심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한국은 선진국이 아닌 신흥개도국입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발전한 경험은 귀국과의 협력에 어느 선진국보다 도움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남북이 분단 되어 있어 매우 강한 방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귀국과 좋은 안보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양국이 신뢰를 갖고 형제 국가와 같은 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직접 만나 설명을 드렸으면 합니다.”
당시 UAE는 무엇보다도 안보 협력에 대한 관심이 컸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UAE 측에 방위산업과 군사 협력에 대한 파격적인 제안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프랑스는 UAE와 긴장 상태에 있는 이란과도 관계를 맺고 있어 UAE측이 다소 망설일 수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내가 한국의 방위력을 강조하며 안보 협력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그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다.
또한 아랍 사람들은 ‘형제’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비즈니스로 맺은 관계보다는 신뢰와 우정을 중시하는 문화의 산물로, 우리와 정서적으로 비슷했다. 모하메드에게 형제 국가의 관계를 맺자고 제안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통령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경제와 안보 협력 등 원자력 이외 분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대표단을 파견해주셔서 양국 간 논의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겠습니다. 만일 대통령님께서 직접 UAE 방문을 희망하신다면 내부 논의를 거쳐 24~36시간 내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 차례 미루어지기는 했지만 통화한 보람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대표단 파견 제안에 관심을 보이면서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여러 분야의 협력이 잘 이루어져 양국이 형제와 같은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입에서도 ‘형제’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좋은 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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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609-611 |
외교 |
2012년 9월 9일 |
쿠피크클라이스트 그린란드 자치정부 총리와의 대화 |
북극이사회 결성과 한국의 역할 당부 |
인사를 나누고 기념 촬영을 한 후 클라이스트는 내게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그린란드를 방문하신 최고위급 정상이시기 때문에 대통령님의 방문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지금 국제사회가 그린란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와 저희는 공동의 이해를 바탕으로 북극정책을 수립 했습니다. 저희는 파트너 국가들과 함께 북극이사회를 결성해 단합 된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하고 있습니다.”
북극항로 개척과 자원 개발은 클라이스트가 말한 북극이사회에서 결정했다. 북극이사회는 1996년 캐나다 오타와 선언을 계기로 만들어진 정부 간 협의체로, 현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캐나다, 미국, 러시아 등 북극에 인접한 8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클라이스트는 계속 이야기했다.
“한국은 정식 옵저버가 되기 위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EU 등 다른 국가들도 있지만 회원국 간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 정식 옵저버 참가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스웨덴이 차기 북극이사회 장관급 회의를 개최하는데 그때 한국이 옵저버로 선정되도록 지원하겠습니다.”
…………………..
나는 클라이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린란드의 인구는 5만 7,000명 정도로 매우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린란드의 전통과 문화가 존중되고 계속 유지·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적인 개발을 통해 전통과 문화가 위협받는 경우를 저는 그동안 많이 봐왔습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 각별히 유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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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665-668 |
경제 |
2010년 7월 28일 |
부동산 문제 논의를 위한 회의 |
경제관련 장관 및 청와대 수석들의 부동산 대책 관련 발언 |
정 장관이 대답했다.
“저도 주택 가격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값 하락을 놓고 정치권의 공격이 거셉니다. 정부가 집값을 낮추어 지지표가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정 장관의 이야기를 듣던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치권이 집값 오를 때는 가만있다가 조금 떨어지니까 야단법석이네요. 서민들 입장에서는 아직도 집값이 많이 비싼데 말입니다.”
나 역시 윤 장관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했다.
“국회의원들이야 지역구에만 가면 ‘아파트값 떨어졌는데 여당이 뭐 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 그렇겠지만, 나는 표를 좀 잃더라도 제대로 가는 게 좋다고 봐요. 정부가 정치권의 소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자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이 또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문제는 거래 실종입니다. 실거래가 위축이 되니 새로 아파트에 입주하려고 분양을 받았는데 기존의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이사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투기 목적이 아닌 주거 목적으로 집을 매매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백용호 정책실장이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사상 처음으로 집값이 떨어지니 추가로 떨어질 것을 기대하며 주택 구입을 미루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동산 거래가 실종되고 있습니다. 또 집값 하락으로 전세물량이 월세물량으로 전환되면서 전셋값도 폭등하고 있습니다.”
정종환 장관이 주택 경기 침체에 따른 문제점을 추가로 지적했다.
“미(未) 입주가 지속되면서 중도금 연체이자에 따른 가계 부담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부동산시장이 침체되면서 이사, 중개, 임대업 등 주택 관련 서민업종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과열 지역의 집값이 안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서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문제였다. 특히 세입자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를 대로 오른 강남 집값 떨어지는 것 자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전세 문제도 그렇고 돈이 돌지 않아 거래가 안 되면 심각하지. 서민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겠어요. 그 부분에 대해 서는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윤증현 장관이 이야기했다.
“거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정책을 펴야 하는지, 아니면 많이 올라 있는 주택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적 인내가 필요한 것인지 결정해야 할 문제 같습니다. 선거도 끝났고 8월 말까지는 비수기입니다. 일단 오늘 문제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고, 좀 더 지켜보다가 8월 말에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나는 참석자들에게 당부했다.
“주택정책에 대해서는 확고한 철학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자꾸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욕을 먹더라도 일관되게 해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정치권이 비판을 하면 대결할 게 아니라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