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 106 위원장 정대철 성원이 되었으므로 회의를 속개하겠읍니다.
2 15 107 위원장 정대철 그러면 다음은 김상만 방우영 이종기 장강재 이상 네 분 증인의 선서와 신문을 하도록 하겠읍니다. 먼저 증인선서를 하기에 앞서 선서취지와 처벌규정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읍니다. 증인은 이번 국회문교공보위원회가 국회법 제61조 규정에 의해 언론문제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개회함에 있어 정당한 이유없이 선서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국회에서의 증언·감정등에 관한 법률 제 12조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만일 양심에 반하여 허위의 증언을 한 때에는 동법 제 14조에 의거 1년이상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증언을 함에 있어 폭행 협박 기타 모욕적인 언행으로 국회의 권위를 훼손하는 때에는 동법 제 13조에의하여 5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고발될 수 있으며 동법 제9조3항에 의거 증인으로 이 법에서 정한 처벌을 받는 외에 그 증언으로 인해 어떠한 불이익한 처분도 받지 아니함을 알려드립니다. 이상입니다.
3 15 107 위원장 정대철 다음은 선서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읍니다. 선서는 증인들께서 단상앞으로 나오셔서 위원장을 향하여 다함께 선서하여 주시고 선서가 끝난 다음에 선서서에 각각 서명 날인하시어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증인들께서 나오셔서 선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만, 방우영, 이종기, 장강재 증인선서) 제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증인에 대해서 신문을 하도록 하겠읍니다. 먼저 통일민주당의 강삼재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해진 시간을 좀 엄수해주셨으면 감사하겠읍니다.
4 15 107 강삼재 위원 통일민주당의 강삼재 위원입니다. 80년도 언론대학살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이자리에서 보도지침이 난무하던 85년부터 국정에 참여한 본위원은 지난 3년동안 전두환정권의 악랄한 언론통제를 저지하지 못한 점 언론인과 국민에게 책임을 통감하면서 깊이 사과드립니다. 본청문회가 이땅의 언론의 과거를 청산하고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장강재 증인에게 묻겠읍니다. 장증인! 장증인께서는 한국일보사의 80년도 강제해직자가 몇 명입니까?
5 15 107 증인 장강재 30명으로 집계됩니다.
6 15 107 강삼재 위원 30명입니까?
7 15 107 증인 장강재 예.
8 15 107 강삼재 위원 해직자 명단은 누구로부터 전달받았읍니까?
9 15 107 증인 장강재 당시 편집이사인 정태현이사로부터 전달받았읍니다.
10 15 107 강삼재 위원 전달받은 명단은 총 몇 명이었읍니까?
11 15 107 증인 장강재 40여명으로 기억이 됩니다.
12 15 107 강삼재 위원 그러면 40면인데 신제 해직자는 30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13 15 107 증인 장강재 그렇습니다.
14 15 107 강삼재 위원 어떻게 줄일 수 있었읍니까?
15 15 107 증인 장강재 그 당시 저를 비롯한 전간부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30명이라는 숫자가 불행하게 다 구하지는 못하는 결과가 되었읍니다.
16 15 107 강삼재 위원 그 당시 전달받은 해직자 명단을 줄이려고 하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줄일 수 있었읍니까? 누구를 만나야 줄일 수가 있었읍니까?
17 15 107 증인 장강재 그 당시 뭐 자세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마는 문공부 보안사 기타 각 정부당국자들 이런 사람들을 전간부가 쫓아다니면서 그야말로 노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8 15 107 강삼재 위원 그 당시 해직자 명단 강제 해직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 증인께서 직접 만난 사람도 있읍니까? 사원을 살릴 욕심으로 한 명이라도 언론인을 구제하기 위해서 직접 발로 뛰면서 누구를 만나 적이 있읍니까?
19 15 107 증인 장강재 여러 사람을 만났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20 15 107 강삼재 위원 그 당시 힘있는 사람은 누구였어요? 누구를 만나서 누구에게 부탁하면 부하직원을 살릴 수 있었읍니까?
21 15 107 증인 장강재 그 당시 아주 여러 분을 만났었읍니다.
22 15 107 강삼재 위원 그 당시 해직자 ⸢리스트⸥가 올 때 그 기준은 어떻게 되었던가요?
23 15 107 증인 장강재 ⸢리스트⸥는 그당시 공식적인 통보가 아니고 비공식 통보였고 그래서 그 명단은 아마 기술한 것을 우리 정태현 이사가 받아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4 15 108 강삼재 위원 그 이후에 복직자는 몇 명입니까? 지금 명 명이 복직되었읍니까? 그 30명 중에...
25 15 108 증인 장강재 저희는 30명중에 복직을 희망하는 사람이 열두 분이 계셨읍니다. 그중에서 열한 분이 복직이 되었고 한 분이 아직 복직 절차중에 있읍니다. 나머지 열여덟 분은 그중에 다섯 분은 주재기자고 다섯 분은 폐간된 서울경제에 포함된 사원이고 나머지 여덟 분중에 한 분은 국회의원이 되셨고 한 분은 대학교수가 되셨고 한 분은 승려가 되셨고 나머지 다섯 분은 한겨레신문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26 15 108 강삼재 위원 간단하게 증인의 견해만 묻겠읍니다. 80년도 단행된 해직이 강압에 의해서 부당하게 취해진 조치라면 해직자의 명예회복과 원상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한다고 보는데 증인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27 15 108 증인 장강재 동감입니다.
28 15 108 강삼재 위원 다음 방우영 증인에게 묻겠읍니다. 80년 7월 30일 신문협회 총회에서 언론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한 적이 있읍니까?
29 15 108 증인 방우영 있읍니다.
30 15 108 강삼재 위원 그때 참석해서 부회장으로 사회 맡았지요?
31 15 108 증인 방우영 그렇습니다.
32 15 108 강삼재 위원 그 당시 결의문은 누가 작성한 것입니까?
33 15 108 증인 방우영 그 당시 결의문은 문공부로부터 신문협회 사무총장께 하달 되어가지고서 그 안을 가지고 제가 사회를 맡았읍니다. 잠깐 답변의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34 15 108 강삼재 위원 제가 질문을 하겠읍니다. 그 결의는 자발적이었읍니까 아니면 강제성이 있었읍니까?
35 15 108 증인 방우영 강제성이었읍니다. 형식은 자발적이고 내용은 강제였다고 저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36 15 108 강삼재 위원 조선일보는 해직자는 총 몇 명입니까? 80년 강제해직자…
37 15 108 증인 방우영 14명입니다.
38 15 108 강삼재 위원 조선일보에서도 해직자 ⸢리스트⸥를 받은 적이 있입니까?
39 15 108 증인 방우영 있읍니다.
40 15 108 강삼재 위원 누구로부터 누가 받았읍니까?
41 15 108 증인 방우영 당시 저희 신문사 부사장이 문공부로부터 1차 경단자를 수교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읍니다.
42 15 108 강삼재 위원 이광균장관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읍니까?
43 15 108 증인 방우영 그렇습니다.
44 15 108 강삼재 위원 그 당시에 해직자 ⸢리스트⸥는 몇명이 담겨져 있었읍니까? 리스트에…
45 15 108 증인 방우영 1차에 5명 2차에 7명 그리고 3차에 2명이 있읍니다.
46 15 108 강삼재 위원 1차에 다섯 명? 그러면 총 및 명이 되나요?
47 15 108 증인 방우영 14명입니다.
48 15 108 강삼재 위원 그렇다면 해직자 ⸢리스트⸥에 담겨 있는 14명 전원을 해직시켰다는 것입니까?
49 15 108 증인 방우영 그렇습니다.
50 15 108 강삼재 위원 그렇습니까?
51 15 108 증인 방우영 예.
52 15 108 강삼재 위원 이 14명 중에 현재 복직된 인원은 몇 명입니까?
53 15 108 증인 방우영 한 분입니다. 그리고 지방주재기자 또 본사 구제된 분이 한 5·6명이 되고 나머지는 저희 동료들 또 저희 간부들이 백방으로 노력해서 해직된 기자를 다 취직시켰다고 저는 보고를 받고 있읍니다.
54 15 108 강삼재 위원 조선일보가 다른 신문사에 비해서 그 당시에 이위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 해직자 리스트는 장강재증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보통 30명선 내지는 20여명선 조선일보에는 그 숫자가 다른 사에 비해서 적은 이유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읍니까?
55 15 108 증인 방우영 그런 일은 전연 없읍니다. 숫자가 적었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56 15 108 강삼재 위원 그런데 14명을 전원을 해직시켰다는데 그 14명 중에서 줄일 수 없었읍니까? 아까 한국일보에서는 40명 내려온 해직자 명단 중에 우리 장강재 증인을 비롯해서 간부들이 뛰어서 12명을 줄였거든요. 그 당시 14명 내려온 명단 그 분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안해 봤읍니까?
57 15 108 증인 방우영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우선 1차 정규만씨를 구재해서 현재 본사 총무부장으로 재임하고 있고 그리고 전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일곱 사람을 그 당시 다른 신문사에다가 동료들이 애써가지고 복직을 시켰읍니다.
58 15 108 강삼재 위원 예. 알겠읍니다. 지금 본위원은 지금부터 80년 당시에 중앙 4대월간지가 신군부의 등자을 앞다투어 과잉보도한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읍니다. 동아일보 80년 8월 28일자 본위원이 빨간 줄 친 부분 ⸢새 시대 기수 전두환대통령 정도 성실 평범 속의 비범 실전 의협심 많은 청소년시절 흰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연습 즐거움에 습관길러⸥ 그 다음에 중앙일보 80년 8월 23일 ⸢내가 아는 전두환장군 청년장교때부터 지휘력 뛰어나 자상하나 의리 저버리면 서릿발 혈연 지연 거부는 천성적⸥ 다음에 조선일보 80년 8월 23일자 ⸢인간 전두환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시념과 의지와 행동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다음 한국일보 8월 23일자 ⸢전두환장군 의지의 30년 그의 통솔력은 기술이 아닌 지극한 정성 예리한 판단력 무서운 지도력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을 헐뜯는 것⸥... 김상만 증인께 묻겠읍니다. 본 위원이 80년도 8월 당시에 그 당시에 각 언론사가 보도한 전두환 대통령 특집기사를 소개해 드렸읍니다. 이와같은 보도는 각 언론사가 계엄하에 마지못해 협력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발적인 것입니까?
59 15 108 증인 김상만 동아일보는 창간 당시부터 편집은 편집인 편집국장에게 맡기고 사장이나 회장은 거기에 관연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읍니다. 따라서 80년 8월 전두환씨에 대한 것도 전연 아는 바가 없읍니다.
60 15 108 강삼재 위원 본위원은 당시의 상황이 불가항력적이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마는 결과적으로 언론이 독재체제구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다음 이종기 증인에게 묻겠읍니다. 80년도 언론통폐합조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압에 의해서였읍니까 아니면 자율에 의해서였읍니까?
61 15 108 증인 이종기 강압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62 15 108 강삼재 위원 잘된 것입니까 못된 것입니까?
63 15 108 증인 이종기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64 15 109 강삼재 위원 본위원이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해 올리겠읍니다. 지금 본위원이 제시하는 이 보도는 80년 11월 17일자 각 신문에 사설을 제가 증인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있읍니다. 통폐합 결의를 하고 난 연후에 각 신문의 사설은 통폐합결의가 잘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읍니다. 방우영 증인께 묻겠읍니다. 그 당시 만약에 이 결의가 잘못된 것이고 강압에 의해서였다면 이와같은 가설을 어떻게 해서 게재가 되게 된 것입니까?
65 15 109 증인 방우영 그 당시 막강한 군부세력에 위한 계엄하에 있었읍니다. 그러한 사설도 제 생각에는 주필을 통하여 정부에서 권유하고 또 게재할 것을 설득했다는 타필에 의해서 그런 사설이 나왔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66 15 109 강삼재 위원 알겠읍니다. 김상만 증인께 묻겠읍니다. 언론을 통제를 위해서 언론인 강제숙정과 언론통폐합 등 80년의 언론대학살을 저지른 바 있는 5공화국 정권은 보도지침을 이용한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언론사와 언론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각종 특혜를 베풀게 됩니다.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각 언론사가 5공화국의 정권으로부터 제공 받은 혜택은 어떠한 것이 있읍니까?
67 15 109 증인 김상만 80년은 지금으로부터 약 8년전의 일이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방송광공사로부터 사원자제들에게 장학금을 준 것이 그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68 15 109 강삼재 위원 증인께 제가 확인을 해 보겠읍니다. 언론통폐합 이후에 81년부터 당장 지면이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됐지요?
69 15 109 증인 김상만
70 15 109 강삼재 위원 다음에 82년 한 해동안에 윤전기 도입시에 20%를 물던 관세가 4%로 낮추어졌지요. 그렇지요?
71 15 109 증인 김상만 그것은 잘 기억이 안납니다.
72 15 109 강삼재 위원 다음 지난 7년동안에 일간신문의 신규발행 인가가 동결이 되어서 서울의 6개 일간지가 독점체제를 지방은 일도일사로 독점체제가 유지됐지요?
73 15 110 증인 김상만
74 15 110 강상재 위원 다음 지난 7년동안 광고물량은 4배로 늘어났으나 언론사는 제한돼 있고 그래서 광고수입이 엄청났지요?
75 15 110 증인 김상만 엄청났다고 하는 것보다는 늘어 났읍니다.
76 15 110 강상재 위원 다음 신문협회를 통해서 구독료인상 및 지면증면 등의 ⸢카르텔⸥체제를 구축했지요?
77 15 110 증인 김상만 신문협회는 발행인이 나가는 곳이 되어서 나는 회장이니까 거기에 나갈 권리가 없읍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읍니다.
78 15 110 강상재 위원 예. 알겠읍니다. 이와 같은 유무형의 특혜로 5공화국하의 언론은 고속성장했음을 본위원은 확인한 바가 있읍니다. 김상만 증인께서 혹시 87년도 동아일보의 자본총계액이 81년에 비해서 몇 배나 늘어났는지를 아십니까?
79 15 110 증인 김상만 잘 기억이 안나는데요.
80 15 110 강삼재 위원 동아일보의 자본총계액은 81년에 비해서 4.5배가 늘어났읍니다. 그리고 6개 일간지의 경우 87년 결산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성장율은 81년 대비 300%로써 우리나라 일반제조업체의 평균성장율을 훨씬 웃돌고 있다는 사실을 첨언해 드립니다. 다음 방우영 증인! 5공화국 출범 이후에 정부가 언론인에게 베푼 각종 시혜로 인해서 각 언론사의 사주는 사원복지비 300억 원 이상을 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81 15 110 증인 방우영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82 15 110 강삼재 위원 그럼 제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겠읍니다. 지난 7년 동안 44억을 들여서 언론인 1,313명을 해외에 시찰시켜 준 사실이 있읍니다. 그리고 177억을 들여서 언론인자녀 연 18만 4,00명의 학자금을 대주었읍니다. 알시고 계십니까?
83 15 110 증인 방우영 그것은 정부의 일방적인 특혜가 아니겠읍니까?
84 15 110 강삼재 위원 그러니까 정부가 언론인에게 베푼 각종 시혜를 제가 설명을 하고 있읍니다.
85 15 110 증인 방우영
86 15 110 강삼재 위원 다음 253명을 해외연수 시켜주고 기자들의 월급 중에 20%를 취재수당으로 인정해서 면세해택을 주었읍니다. 아시고 계시지요?
87 15 110 증인 방우여 알고 있읍니다.
88 15 110 강삼재 위원 그밖에 언론인 9,000명에게 주택자금을 융자해 주었고 생활안정자금을 대부해 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89 15 110 증인 방우영 보고받았읍니다.
90 15 110 강삼재 위원 증인께 묻습니다. 정부가 왜 이같은 혜택을 언론인들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91 15 110 증인 방우영 언론에 대한 일반적인 선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92 15 110 강삼재 위원 본위원이 판단하기로는 언론인들에 대한 복지를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위원은 이같은 혜택을 언론사의 사주가 베풀어야지 정부가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데 증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93 15 110 증인 방우영 옳은 말씀입니다.
94 15 110 강삼재 위원 정부로부터 그러한 혜택을 받으면서 어떻게 정부의 감시자가 될 수 있겠읍니까?
95 15 110 증인 방우영 이 자리에서 저는 이렇게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같이 정부의 일반적인 선심이라는 측면도 있읍니다. 그러나 본증인 또 조선일보사는 5공과 유착해서 소리를 택한 일이 한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읍니다.
96 15 110 강삼재 위원 본위원은 이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장강재 증인 지난 80년도 권력이 무자비할 때 언론이 완전히 손을 들었지요?
97 15 110 증인 장강재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98 15 110 강삼재 위원 이종기 증인 보도지침 전화 한 통화에 언론이 놀아난 것을 인정하십니까?
99 15 110 증인 이종기 부분적으로는 인정을 하겠읍니다.
100 15 110 증인 방우영 그런 사실없읍니다.